2015. 02. 22
이상한 버릇이 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예정이 잡히면 잠들고 싶지 않아지는 이상한 버릇이. 눈 뜬 다음날의 나에게 좋지 않을 것이 물 보듯 뻔함에도, 이상한 오기가 생겨 할 것이 없는 새벽을 빈둥대며 보내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이사를 앞두고 할 일이 많음에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생각한다.
최근들어 순정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새벽의 연화(옆에 두고도 바라만 보고 있는 학이 너무 짠하다ㅠㅠ ) 뒷부분이 궁금하여 찾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고 (NG라이프/ 폼페이 시대에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주인공이 주인공인 연식 조금 된 작품. 이성친구였던 아이가 히로인으로 등극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취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상대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쪽이 나에게는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 듯 하다.), 블로그를 헤매며 추천 순정만화를 계속 검색하다 어제 밤샘하며 본 작품이 악마와 러브송.
나의 고유한 버릇도 한 몫 했겠지만, 오랜만에 푹 빠져서 완결까지 본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글로 써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내 밤잠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독특하게도 일본 문화에 어울리지 않게 직설적인 타입의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다. 외모는 빼어나지만 대화하는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는 직설화법으로 사람들의 꺼림을 받던 주인공이,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반 아이들을 가식 없이 서로를 대하게 만들고 자신의 과거를 극복한 후 남자주인공가 잘 되어간다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정석대로의 순정만화이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라는 제한된 곳에 작가라는 한 사람이 만들어낸 세계를 온전히 조리있게 그려내고, 사건을 전개하며, 인물들의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품도 언뜻 보기에는 완결까지 완전체로 보이지만 곳곳에 억지스러운 부분이 보였다. (물론 이 억지란, 단지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억지로 여겨지는 부분이거나 내가 복선을 주의깊게 보지 않아서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반을 교화하느라 바쁘던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난 주인공에게 어두운 과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에 가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주인공의 말도 못하게 어두운 과거지사라던지, 그 사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의 입을 통해서 라는 점이라던지. (정말 친구라면 이런 내용의 말은 하지 않아주는게 예의 아닐까) 또 그것을 믿는(!!) 남주에,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 (그것도 두 명)에게 퍼뜨리는 남주란. 입이 가벼워도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반 아이들과의 갈등이 해결되며 나타난 옛 친구의 감정노선은 도무지 난해하여 알아먹을 수가 없었고 (내가 나이가 들어 고등학생의 감정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인가), 친구의 말을 믿고 여주에게서 멀어진 남주 대신 여주의 옆에 남았던 서브남주에게 여주가 반하지 않은 이유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비극적인 과거지사를 듣고 "난 그래도 이 아이와 함께 떠올려가며 극복해내겠어" 이와 같은 누구보다도 남주다운 정석을 보인 인물이었는데) 누구 하나도 버리기 아까워 하나는 남친 삼고, 하나는 남동생 삼고, 하나는 영원한 친구로 삼은 결말도, 남 주기 아까우니 나 다 가져야지 하는 작가의 심보가 드러난 것 같았고.(사귀지 않을 상대라면 깨끗하게 잘라줘야 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 생각된다.) 뒤늦게 생각났으니 추가하자면 성폭행 가해자가 뒤늦게 반성하는 마음에 신부가 되어 고아원을 운영하고 피해자를 사랑하게 된다...? 미화에도 정도가 있지 질이 나쁘다. 성폭행에 의한 성관계는 단순한 폭력이지, 이런 식으로 미화가 가능한 것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를 모르기에 가능한 것이려니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문화가 잘못된 식으로 자리한 탓일까;
뭐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이지만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라 좋았고,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모이게 되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밝아져가는 여주의 모습 또한 보기 좋았다. 보기 드물게 소심하고 음험한 남주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서브남주들이 그 마이너스 요소를 채워줬다.
의도치 않게 단점이 너무 부각된 감상문이 완성 되어 버렸지만; 오랜만에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다음에 다시 천천히 보며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 보아야 겠다. 그리고 내게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되지 않는 사건, 현상이라도 다 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을 듯 하다.
+) 이어서 본 작품으로는 여왕의 꽃. 장차 여왕이 될 여주인공이 아주 늠름하고 멋있으며, 그 옆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남주 또한 보는 맛이 있다. 다만 과거 회상 식의 언급이 계속되어 배드엔딩으로 끝나거나, 비극적인 결말 후 1화부터 다시 시작하는 전개가 될까 걱정이 된다.